MOVIE REVIEW- <Attila Marcel>(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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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Attila Marcel)>(2013)
감독: 실뱅 쇼메
출연: 귀욤 고익스 (폴 역), 앤 르 니 (마담 프루스트 역), 베르나데트 라퐁, 엘렌 뱅상
과거의 기억을 꺼내어 본다는 것, 그 기억이 좋은 것일 수도, 차라리 잊고 있었던 게 나을 정도로 생각하기 싫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마치 보물찾기 마냥 꽤나 매력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누구나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데, 수많은 기억들 중 어떤 항목들이 망각되었는지 인지하기란 어렵다. 애초에 인간이 기억의 전수조사를 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그러나 인간의 무의식은 그 경계가 모호하며 역동적이라, 때로는 사라졌던 기억들, 그러한 기억들이 있었는지도 몰랐던 것들이 물속에 얼음 떠오르듯 둥실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주인공 폴은 어릴적 사고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 충격으로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남은 두 고모들에 의해 피아니스트가 되도록 키워졌다. 중국인들의 잇따른 해외진출;;(장담컨대 화성에도 중국인들은 있을 것이다)에 폴은 계속 실패를 맛봐야 했고 고모들이 운영하는 발레샵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고 고모들과 산책을 나갔다 들어오는 것이 반복인 일상에 무료함을 느끼지만 벗어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그러다 우연히 4층 마담 프루스트의 apartment에 들어갔다가 비밀리에 그녀가 정원을 가꾸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정원에서 나는 채소들로 만든 차와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는 물건, 혹은 음악으로 그녀는 사람들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주는 불법 개인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마담 프루스트는 굉장히 괴팍스러우며 돈을 밝히는 여성의 이미지로 다가왔는데, 그것은 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것임을 새삼 또 되새기게 된다.
어쩄든 폴은 마담 프루스트를 통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을 찾고, 그 기억에 울고 웃는다. 돌이키기 싫은 기억들이 떠올랐을 때는 마담 프루스트의 집에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문을 박차고 나가기도 하지만, 감독은 마담 프루스트의 원 모델이기도 한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격언을 인용해 영화 초반에 이미 (폴이 아닌!)우리에게 경고를 때렸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이렇듯, 인간이 살면서 행복한 일들만 있을 수 없기에, 망각을 신이 내린 최소한의 자비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살면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 생생히 기억나고 그것들을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인간은 아마 미쳐버리지 않을까.
기억의 또 한가지 재미있는 특성은, 기억에는 조작 및 왜곡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모든 추억은 아름답거나 슬프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그렇다.
본인의 지론인데 이 부분에서 '아름답거나 슬픈' 이유도 일종의 왜곡이다. 기억을 일어난 사실 그 자체, 혹은 그 때의 그 상황에서 느낀 자신의 감정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좋은 기억이라면 그 당시의 좋았던 '감정'과 '좋았다고 느꼈던' 인지, 그리고 다시 그떄로 돌아가고 싶은 '향수'가 섞여 미화될 가능성이 크다.
폴의 경우, 좋았던 기억들의 배경은 따뜻한 배경과 웃는 얼굴을 한 가족들, 기분좋은 음악으로 세팅되어있다. 현실이 그랬을까? 아니다. 폴의 무의식에서 그러한 조작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나쁜 기억이라면 어떨까? 좋은 기억이 미화되는 것처럼 나쁜 기억 또한 그 상황 그대로 기억하는 경우는 드물다.
생각보다 고통의 기억은 쉽게 사라진다. 인간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본능의 일부인지도 모르겠다.
트라우마는 고통의 감각이 각인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고통을 느꼈다는 자신의 '인지'가 특정 물체나 대상에 대해 일종의 공포로 각인되는 것이다.
즉, 나빴던 상황이 기억되는 과정에서 고통 자체에 대한 기억보다는, 그 상황에서 본인이 고통을 느꼈다는 인지 즉 고통을 느꼈던 본인에 대한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선명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고통에 대한 기억이 망각되는 과정에서 그 기억 자체가 변질되거나 그 빈틈으로 다른 요소들이 침입할 수 있는 여지가 높아진다.
그 중 하나가 이 '공포'의 감정과 대체되거나 공존하는 '서러움' 이라는 녀석이다. 앞서 말했듯 고통과 관련한 기억에서 고통 그 자체에 대한 기억보다 '그 감정을 느꼈던 본인'이 기억된다. 그 과정에서 고통에 대한 '공포'는 그 고통을 느꼈던 자신에 대한 '서러움'으로 자가 변이를 한다.
자기 설움, 즉 고통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더 정확히는 그 고통의 한복판에 있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며 현재의 자신이 그를 만져줄 수 없음에 서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인간은 이 서러움이라는 감정과 아주 묘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기에 멀리할 듯 싶으면서도, 오히려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 이 감정을 더 느끼려 하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아주 쉬운 예로 슬플 때 더욱 슬픈 음악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서러웠던 기억들을 더 생각함으로서, 무언가 내면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는 시도가 아닌가 추측된다.
아 여기까지 쓰고 있는데 개복잡하다 심리학 수업들 더 잘 들어둘걸.
용어라도 제대로 써먹을텐데. 읽는 당신들은 오죽할까. 미안하다.
어쨌든, 이러한 작용들의 정확한 과정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히 밝혀진 바 없다. 위의 낭설들은 다 본인의 추론이다. 반박의 의견 환영한다♡.
위의 내용들이 맞다는 가정하에, 기억의 망각은 나름대로 인간이 본인이 받는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방어하며 컨트롤 하는 프로세스 역할 또한 하고 있다.
이러한 프로세스의 부차적인 결과로 기억의 오류 및 억눌린 무의식 등이 부정적인 상황을 초래하는데 마담 프루스트는 바로 이 부분에서 폴이 아버지에 대한 악몽을 꾸는 것,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것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폴은 이제껏 억눌려왔던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해주지 않았던 그 무언가, 그러나 자신에게 꼭 필요했던 그 무언가를 훗날 자신의 자식에게 해주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류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 폴은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참으로 효율적인 해결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이해하고 포용함과 동시에 이를 거울삼아 자신과 자식의 관계를 시작해나가고, 실어증까지 고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잠재되었던, 그리고 해결되지 않았던 무의식의 '화'가 기억의 줄기를 타고 감자 떨어져나오듯이 우수수 쏟아져나오는 경험을 폴은 했던 것일까.
기억에 대한 많은 고찰을 할 수 있었던 계기이고, 한 편의 예쁜 영화였다. 특히 마담 프루스트의 차를 마시고 난 후 폴의 회상씬들은 모두 하나같이 아름답게 표현이 되었다. 레트로 풍의 빛바랜 화면들, 애니메이션 감독을 했어서인지 색감과 음악들을 활용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폴의 회상씬들은 그것이 좋은 기억이었든 나쁜 기억이었든간에 모두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심지어 음악도 흘러나오고, 사람들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른다. 그렇다면, 마담 프루스트로 인해 떠오른 기억들이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기억 그 자체란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머리가 깨진다.)
영화는 해피엔딩이고, 폴이 앞으로 새로 꾸리게 된 가족과 새로운 삶을 희망차게 시작할 듯 보인다. 강요되었던 직업인 피아니스트 외에, 본인이 좋아서 할 수 있게 된 직업을 또 하나 찾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 묘하게 괴리감이 든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다.
우리는 그 차를 제조할 수 있는게 아니잖은가. 맘만 먹으면 찾아가 하소연하고 기억을 끄집어내줄 마담 프루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생각이 든다. 과연 우리에게 마담 프루스트는 무엇인가?
만약 나에게도 마담 프루스트가 있다면, 나는 선뜻 그녀의 제안에 응해 무의식의 기억을 향해 모험을 할 수 있을까? 진정제일지, 독약인지 모르는 그 기억들을 한번에 움켜잡을 수 있을까?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폴은 어쩌면 굉장히 쉬운 방식으로 기억과 맞대면 한 케이스에 해당할는지도 모른다. 실제적으로 현실의 삶에서 자신의 잊혀진 기억을 단돈 50유로와 맞바꾸기란 어려우니까.
우리는 다만, 언제 찾아올지(떠오를지) 모르는 기억의 줄기들에 당황하지 않을 준비, 그 줄기들을 큰 내상 없이 컨트롤 할 준비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더불어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각, 그것만으로도 기억의 왜곡으로부터 벌어지는 부정적인 상황들로부터 받는 데미지의 정도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거면 되는게 아닐까, 줄기를 파헤치고 그 생김새와 그들이 연결되어 있는 뿌리를 발견하는 것도 좋지만, 흙 위로 자라는 예쁜 꽃들도 사랑하고 싶다. 가끔씩 힘이 죽어 시들어있는 이파리 하나까지도, 그 모두가 '나'라는 인간으로부터 나온 나의 일부분이다.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중구난방 늘어져있다. 논문쓰는 것도 아니고, 생각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끄적여 놓았다. 읽어주신 분들 감사하다. 못난 내 글솜씨를 탓하라.